이탈리아 귀족 가문 사람들 모음/스포르차 가문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Mintaka5 2024. 8. 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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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eazzo Maria Sforza, 1444~1476, 재위1466~1476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44년 페르모에서 아버지 프란체스코1세 스포르차(Francesco Ier Sforza, 1401~1466, 재위1450~1466)와 어머니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Blanche Marie Visconti, 1425~1468)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배경

아버지 프란체스코를 이어 두번째 밀라노 공작에 오른인물로, 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했지만, 폭군. 아버지 서거후 어머니와 공동통치를 했으나 어머니를 내쫓는다....  폭군의 기질도 보임과 동시에 음탕하기 그지없었으나 예술의 후원자로서 특히 음악쪽으로 후원을 많이 한것으로 유명한데,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르네상스를 발전시켰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재위

아버지 프란체스코가 1466년 서거하면서 22세의 나이로 밀라노 공작이되며 통치자가 되는데, 아버지 서거전부터 당시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골이 깊을때로 깊어져있던 상태였는데, 갈레아초는 프랑스 왕 루이11세(Louis XI, 1423~1483, 재위1461~1483)와 동맹을 맺어 루이11세를 돕기위한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에 가있던시기에 아버지가 서거하게 된 것.

그래서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밀라노로 와야했는데, 밀라노에 당도하려면 적국인 사보이 공작령을 지나야했기때문에 가명을 써서 지나 다행이 걸리지 않고 밀라노에 입성. 어머니와 함께 공동통치를 하는데 있어 처음에는 공작으로 계승케 해준점을 감사하는 마음과 경의를 표하며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탐욕과 무자비함으로 인해 어머니의 조언도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게 되면서, 결국 어머니를 크레모나로 떠나도록 강요시킴. 

그래도 아들은 아들인지라 1468년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여 딸과함께 밀라노와서 축하를 해주고, 이후 다시 크레모나로 돌아가는 길목에 병을 얻어 6개월을 넘기지못하고 그해 말에 사망. 

 

니들 빽 해줄게

앞서 배경에 언급했다시피 음악의 후원자로서 유명했던 갈레아초는, 스스로가 만든 악단에 아낌없는 재정지원과더불어 스스로 운영을 도맡아하며 유럽내에서 가장 유명한 악단이 되는데, 당시 유럽에 이름좀 꽤나 날리는 음악가들은 이곳으로 다 모여 악단에 초빙돼 노래를 부르고 미사곡을 쓰고 갈레아초 공작을 위한 음악도 쓸 정도로(사회생활좀 하네?)..

모든 음악가들을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몇몇 언급은 해보겠다.

  생몰년도 음악스타일
알렉산데르 아그리콜라(Alexander Agricola) 1446~1506 프랑코-플랑드르
요하네스 마르티니(Johannes Martini) 1440~1498 부르고뉴
로이세 콤페레(Loisé Compère) 1445~1518 프랑코-플랑드르
가스파 반 베르베케(Gaspar van Verbeke) 1455~1517 네덜란드-부르고뉴

 

암살

람푸냐니의 음모 - 갈레아초 공작 암살

갈레아초는 앞서 언급했듯이 폭군적기질의 잔혹성과 여성편력까지 어마무시했는데 차마 쓰기는 뭐 같지만.. 이런 일들이 있다. 갈레아초는 양성애자였는데, 그의 상대 파트너로 22세의 암브로지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상황을 피하고싶어 스스로 거세를 했고,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손을 절단하고 산채로 묻는 잔혹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사냥금지령을 내렸는데 불구하고 토끼사냥을 한 농부를 질식할때까지 그가잡은 토끼를 통째로 삼키도록 강요, 산채로 가두고 굶어 죽인다. 또 양성애자로서 남자, 여자, 다른 사람의 아내까지 강간한것으로도 모자라 측근의 아내까지 강간하기에 이른다. 오죽하면 이발사가 실수로 머리를 잘못잘랐다는 이유로 네대의 채찍질을 당한게 가장 가벼운 처벌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여튼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갈레아초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점점 사람들로부터 쌓여가는데 1476년 원래부터 스포르차가에 적대감을 품고있던 카를로 비스콘티(Carlo Visconti, ?~1477), 제롤라모 올지아티(Gerolamo Olgiati, 1453~1477) 조반니 안드레아 람푸냐니(Giovanni Andrea Lampugnani, ?~1476)등 3명의 궁정 신하들이 주군을 암살하는 계획을 짜게 된다.

이들은 갈레아초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핀 뒤 1476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 약 30명의 공모자까지 포섭해 갈레아초 공작이 미사를 위해 올 교회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갈레아초가 당도하자마자 람푸냐니는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몇마디 주고받은 뒤, 일어나서 칼로 찔러 암살하게 된다. 모두 암살이후 현장에서 탈출하지만 람푸냐니는 교회내 경호원에게 현장에서 살해당함. 카를로와 제롤라모는 며칠만에 붙잡혀 처형된다.

 

선동이 있었네..?

30명의 공모자의 자백으로부터 이미 몇달전 밀라노를 떠난 인문학자 콜라 몬타노(Cola Montano, 1440~1482)가 이들을 선동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몬타노역시 갈레아초에게 스포르차 가 가정교사에 대한 풍자를 쓴 혐의로 인해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가 이런 선동을 했다고 한다. 몬타노는 밀라노를 빠져나가서 붙잡히진 않았지만, 당시 스포르차와 동맹 가문이던 토스카나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재임1469~1492)정부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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