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조/수나라

수 문제 양견

Mintaka5 2025. 9. 1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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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초대 황제 문제 양견(文帝 陽堅, 541~604, 재위581.03.04~604.08.13)

  전임 황제 당시 재직 황제 후임 황제 
직위 노왕(魯王), 북주 황태자, 북주5대(마지막)황제, 개국공(介國公)  수왕(隨王), 수나라 초대 황제 진왕(晉王), 수나라 황태자, 수나라 2대(마지막)황제
가문(황조) 북주(北周) 수(隨)
명칭(묘호) 묘호 없음, 정제(靜帝) 고조(高祖) 세조(世祖)
휘(이름) 우문 천(宇文 闡) 양견(楊堅) 양광(楊廣)
출신 북주, 장안(長安)
생몰년도 559.08.01 ~ 581.07.09 541.07.21 ~ 604.08.13 569.xx.xx ~ 618.04.11
재위 노왕(魯王)
579.02.22 ~ 579.03.09
수왕(隨王)
581.01.03 ~ 581.03.04
진왕(晉王)
581.03.15 ~ 600.12.13
북주 황태자
579.03.09 ~ 579.04.01
수나라 황태자
600.12.13 ~ 604.08.13
북주 5대(마지막)황제
579.04.01 ~ 581.03.04
수나라 초대황제 
581.03.04 ~ 604.08.13
수나라 2대(마지막)황제
604.08.13 ~ 618.04.11
개국공(介國公)
581.03.04 ~ 581.07.09

수나라 초대 황제 고조 문제 양견
수 고조(문제) 양견,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541년 7월 21일, 북주 장안(長安)에서 아버지 수국공 양충(隨國公 楊忠, 507~568)과 어머니 여고도(呂苦桃,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선비족 출신 수나라 초대 황제로, 혼란스러웠던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하고 통일 중원 왕조를 개창하고 황제가 되어 뛰어난 통치력과 군주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 개황성세(開皇盛世)를 이룩한 명군이였으나, 수 양제에게 황태자 자리를 내준 다음부터 수나라의 국운이 점점 기울기 시작하면서 수나라는 4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를 뒤안길로 멸망하게 된다.  

 

수나라 건국과정

선비족 출신으로 북주에서 수국공이던 아버지 양충과 어머니 여씨 사이에서 태어난 양견은 559년 18세일 때, 북주 대장군인 독고신(獨孤信, 503~557)의 7녀인 독고가라(미래의 문헌황후, 獨孤加羅, 543~602)와 결혼하면서 선비족과 선비족끼리의 규합으로 세가 넓어지고 영향력이 커진다. 이후 주 고조 무제 우문옹(高祖 武帝 宇文邕, 543~578, 재위560~578)으로부터 수주자사 직위를 받고 아버지 수국공 양충이 568년 사망하게 되면서 27세의 나이로 수국공(隨國公, 세습작위)작위까지 세습받게 된다. 부친 양충이 살아 생전 북주에서도 꽤 많은 공훈을 세워놓은상태였기도 하였고 양견 스스로 자체의 능력도 출중하였기에 북주 내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북주 내에서 양견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양견을 견제할 세력또한 많아지는데 북주 고종 선제 우문윤(高宗 宣帝 宇文贇, 559~580, 재위579~580)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양견의 위치는 더욱 두각을 보이게 되는데, 특히 선제는 양견의 딸인 양려화(천원대황후[天元大皇后], 楊麗華, 561~609)를 황후로 맞이하여 양견은 선제의 장인이되면서 황실 외척세력이 된다. 그러나 어리고 난폭한 성격을 가진 선제는 폭정을 거듭하고 양견이 인심을 얻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1년도 안되는 재위를 끝으로 아들 우문천(미래의 정제)에게 넘기고 자신은 태상황제가 되어 즐기고 북주의 모든 실권은 장인인 양견에게 넘기게 되는데 1년만인 580년 21세로 사망해버린다. 

 

수나라 초대 황제

I. 전국 통일과 개황의 치(開皇之治)

581년 1월 3일 양견은 정제로부터 수왕(隨王)작위를 하사받은지 2개월 만인 581년 3월 4일, 북주 정제로부터 선양형식으로 황제위를 넘겨받게 되고 수나라(隨)를 건국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위진남북조시대가 현재 진행중이였던 상태였고, 문제는 즉위 직후 중원 전국을 통일하는 사업을 제1의 사업으로 삼고 바로 남쪽 진나라를 차남 양광(미래의 수 양제)으로 하여금 공략하게 하고 589년 양광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면서 전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차남에게 진왕(晉王)작위를 내리기도 한다. 문제는 내정적으로도 과거제를 실시하여 뛰어난 인재를 등용시켜 관리로 채용하고, 백성의 소리를 최대한 듣고자 노력하여 부담을 덜어주려고 애쓴 군주로 군주 스스로도 근검, 절약정신을 통해 황실 소비를 크게 줄이고 황실 국고를 든든하게 채워놓게 된다. 민심을 잘 살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수 문제 양견이 재위하고 있던 23년간(581.03.04~604.08.13)의 기간을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II. 고구려 공략

내치로서는 더할나없이 훌륭한 통치를 하여 칭송을 받고 국가가 안정된 것을 목격한 수 문제는 수나라 경계지역에 있던 국가들과의 외교, 전쟁문제에 집중하게 되는데, 서북방 유목민족 돌궐의 경우엔 단순하게 경고와 당근을 고루 쥐어주며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동부 경계에 있던 고구려는 도무지 통하지 않았고 비밀리에 사신을 통하여 고구려를 염탐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하게끔 지시하는데, 고구려는 이에 질세라 동시에 사신을 보내 수나라의 동태와 지형지물을 파악하게끔 하는 작전을 펼친다. 고구려 26대 태왕 고대원(영양태왕, ?~618, 재위590~618)은 수 문제가 비밀리에 고구려를 공략할 병력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598년 말갈군1만명과 같이 직접 임유관(국경지대)을 선제 공격하게 되면서 제1차 고-수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수 문제는 고구려의 선제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5남 한왕 양량(楊諒, 575~605)과 왕세적(王世積, ?~599)을 대원수로 하여금 육군지휘를, 수군 총관 주라후(周羅睺, 542~605)에겐 수군을 맡겨 30만명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양량의 육군은 요하에 도달하면서 온갖 전염병과 식수문제, 식량문제에 부딫히며 전투도 해보지도 못하고 철수하고 주라후의 수군역시 폭풍우를 만나 크게 병력을 잃고 철수했다고 전해진다.   

 

III. 차남 양광(미래의 수 양제)

차남 양광은 589년 진나라를 정벌하고 진왕(晉王)작위를 가지고있던 황자였는데, 이미 양광의 형인 양용(楊勇, 564~604)이 황태자였기에 황위계승순위에서는 밀렸는데, 황태자가 주색을 탐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있던 것에 안그래도 못마땅해하던 수 문제와 문헌황후는 황태자의 비인 태자비 윤씨가 병이나서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경도 쓰지 않고 주색을 탐하던 모습에 문헌황후가 직접 황제에게 황태자를 바꿔라고 주청하게 되는데 이에 재상이자 상서좌복야 고경(高熲, 542~607)이 폐하지말라고 주청하지만,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던 문제는 600년 12월 13일, 황태자 양용을 태자위에서 폐하고 차남 진왕 양광을 황태자로 책봉하게 된다. 양광은 황태자가 된 이후 두개의 가면을 고루 번복해가면서 처세를 부리다가 604년 8월 13일 부황 문제가 사망하게 되면서 수나라 제2대 황제로 오르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것 처럼 부황의 후궁이였던 선화부인 진씨(宣華夫人 陳氏, 577~605)를 탐하고 수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고구려전쟁에 막대한 국력을 쏟아 결국 수나라가 40년의 역사도 채 가지못하고 멸망하게 된 장본인이라 할 수있다. 

 

최후

문제는 수나라의 민심을 잘 살피고 국가의 재정을 살찌운 훌륭한 군주였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직접 언급한 법령을 파기하고 사람을 때려죽이는등 점차 궁이 혼란스러워지는데, 602년 황후인 문헌황후 독고씨가 사망하면서 더욱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병져 눕게 된다. 이 때를 노려 폐태자인 양용이 반란을 모의하게 되는데 환관이 전달과정에서 실수로 차남 양광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것으로 잘못 전달하여 대노한 문제는 심지어 자신의 후궁 선화부인 진씨까지 범한 황태자 양광을 폐서인시키기로 하지만 양광이 한발 더 빠르게 움직여 문제의 근위장이지만 양광의 심복이였던 장형(張衡, ?~612)에 의해 시해당하게 되는데 이 때가 604년 8월 13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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