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왕조/아이유브 왕조

살라딘

Mintaka5 2025. 8. 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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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uf ibn Ayyub, 1137~1193, 재위1174~1193)

  전임 술탄 당시 재직 술탄 후임 술탄
직위 알레포, 다마스쿠스 에미르, 이집트 술탄 이집트 와지르, 이집트, 시리아 술탄 이집트 술탄
가문
(왕조)
젠기데스 아이유브
명칭 누르 앗딘
Nur al-Din 
살라딘
Saladin
알 아지즈
출신 모술 아바스 칼리파국, 티크리트 이집트, 카이로
생몰
년도
1118.xx.xx ~ 1174.05.15 1138.xx.xx ~ 1193.03.04 1171.xx.xx ~ 1198.11.29
재위 알레포 에미르
1146.xx.xx ~ 1174.05.15
이집트 와지르(재상)
1169.03.26 ~ 1174.05.15
이집트술탄
1193.03.04 ~ 1198.11.29 
다마스쿠스 에미르
1154.xx.xx ~ 1174.05.15
이집트, 시리아 술탄
1174.05.15 ~ 1193.03.04
이집트 술탄
1168.xx.xx ~ 1174.05.15

아이유브 왕조 초대 술탄 살라딘
살라딘,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138년, 아바스 칼리파국 티크리트(Tikrit)에서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Najm al-Din Ayyub, ?~1173)와 어머니 시트 알-물크 파트마 카툰(Sitt al-Mulk Fatma Khatun,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3차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과 교전을 벌인 이슬람 술탄으로 유명한 인물이며 아이유브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술탄이다. 군인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면모로 독서와 시 낭송을 좋아하였고 독실한 무슬림이였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봤을 때 드문 현실주의적 성향을 가졌고 온화한 성품에 약속과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고 전쟁포로들에 대한 인도적인 처우와 살상을 최대한 피하고 약탈을 금지하는등의 행보로 당시 유럽 기독교인들에게도 상당히 존경받는 군주로 남아있다. 제3차 십자군(1189~1192)이 종료되고 1년뒤인 1193년 3월에 사망한다. 

 

초년

현재 이라크에 위치한 티크리트(Tikrit)에서 태어났지만 살라딘이 태어나기 한해 전인 1137년에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가 살라딘의 삼촌인 아사드 알딘 시르쿠(Asad al-Din Shikuh, )에 의해 티크리트에서 추방되고 살라딘은 추방당하면서 티크리트를 떠난 당일 밤에 태어났다고 한다. 1139년, 어린 살라딘은 가족들과 함께 모술(Mosul)로 이주하여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가 당시 모술에 있던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Imad al-Din Zengi, 1085~1146, 모술에데사1127~1146, 알레포에데사1128~1146)에 의해 사령관에 임명된다. 1146년 이마드 앗딘 장기가 사망하면서 장기의 아들 누르 앗딘(Nur al-Din, 1118~1174, 알레포에미르1146~1174, 다마스쿠스에미르1154~1174, 이집트술탄1168~1174)이 아버지 장기가 가지고있던 에미르직위와 술탄직위를 물려받고 통치를 하게 된다. 이후 청년이 된 살라딘은 군 경력 쌓기보다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더 좋아하여 수학, 종교, 과학, 외국어(쿠르드어, 튀르크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등)등을 공부하여 학자로서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특히 종교 연구에 심취한 살라딘은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발생한 제1차 십자군 원정(The first Crusade, 1095~1099)이 자신의 종교 연구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집트 와지르(재상)

1160년대 10대의 파티마 왕조 술탄 칼리파 알 아디드의 와지르(재상) 샤와르(Shawar, ?~1169, 이집트재상1162~1163, 1164~1169)가 이집트에서 쫓겨나 누르 앗딘에게 가서 군사 지원을 요청해 누르 앗딘의 수하였던 26세의 청년 살라딘도 주군을 따라 1164년 디르감 원정(Dirgham expedition)에 참전한다. 원정에서 승리하고 샤와르가 다시 재상에 복귀하는 성과를 얻지만 디르감 원정 전투들은 살라딘이 주도한 전투가 아니였기에 크게 활약을 한 활약상은 다루지 않는다. 디르감 원정 이후 3년이 지난 1167년, 십자군이 이집트를 재침공하면서 벌어진 알바베인 전투(The battle of al-Babein, 1167.03.18)에서 살라딘의 본격적인 활약상이 도드라진다. 이 전투에서 살라딘은 삼촌인 아사드 알딘 시르쿠(Asad ad-Din Shirkuh, ?~1169, 와지르1169)휘하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용맹술과기만술을 번갈아가면서 발휘하여 십자군을 이집트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낸다. 하지만 시르쿠와 살라딘 휘하의 병사피해도 만만치 않았기에 완벽한 승리라 보긴 어려운 점이 있다. 재상 샤와르는 시르쿠와 살라딘의 전투 승리이후 영향력이 상승한 시르쿠를 특히 경계하고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샤와르가 예루살렘 왕 아말릭1세(Amalric I, 1136~1174, 재위1163~1174)에게 접근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기회를 노리던 아말릭1세는 이때를 틈타 군대를 모아 이집트로 가서 샤와르의 병력과 합류하여 시르쿠와 살라딘의 군대를 공격하여 기습을 받은 시르쿠가 군대를 후퇴시키지만 그곳마저 포위당하게 된다. 사실상 유리한 고점을 잡은 샤와르와 아말릭1세 연합군은 샤와르의 이후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한 시간을 벌기위한 지연책으로 인해 시간이 흐르는데, 이는 누르 앗 딘(Nur al-Din, 1118~1174, 재위1146~1174)이 시르쿠를 살리기 위해 안티오크 공국 보에몽3세(Bohemond III of Antioch, 1148~1201, 재위1163~1201)의 군대를 격파하고 공작 보에몽3세를 포로로 잡아버림으로서 예루살렘 왕 아말릭1세가 안티오크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급히 돌아가야 했던 아말릭1세는 비밀리에 시르쿠와 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한다. 이후 샤와르는 불리한 조치와 더불어 입지 불안정으로 인해 1169년 1월 초 살라딘의 손에 암살당하고 시르쿠가 이집트의 재상이 되지만 2개월 뒤 3월에 시르쿠가 사망해버리며 살라딘이 실권을 잡게 된다. 재상이 된 이후 여러 암살시도를 겪지만 정보를 미리 수집하여 파악한 뒤 조치를 취한 덕분에 살고 반대파가 일으킨 반란까지 결정적으로 장악하고 완전히 이집트의 재상으로서의 입지를 곤고히 하게 된다. 내적으로 안정화를 취한 다음엔 십자군과도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즉위

1171년 9월, 살라딘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시리아 출신 파티마 왕조 칼리파 알 아디드(Al Adid, 1151~1171, 재위1160~1171)가 사망하면서 실질적인 이집트 통치를 시작하지만 실질적인 통치자 누르 앗딘이 살아있었기에 최대한 마찰을 피하면서 내치에 집중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딘이 사망하면서 살라딘이 이집트 술탄으로 등극하게 되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게 되면서 270년간 이어져온 파티마 왕조가 종료된다. 

 

십자군과 보두앵4세

누르 앗 딘이 사망하고 살라딘이 즉위하면서 세력을 넓혀가고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함에 따라 십자군 국가에서 살라딘의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해 정탐과 정보수집등을 급하게 서두른다. 시리아와 자지라에 있던 살라딘의 경쟁자들은 살라딘을 인정하지 않으며 전임 군주이자 술탄이였던 누르 앗 딘과 그의 아들을 공격한 살라딘을 맹비난하고 여론을 통해 몰아세우지만 십자군으로부터 이슬람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임을 주장하고 강조하면서 크게 먹히지 않고, 1175년 4월 13일 장기 왕조 군대가 살라딘의 군대를 공격하지만 살라딘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주권자로서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살라딘은 특히 예루살렘 왕 보두앵4세(Baudouin IV, 1161~1185, 재위1174~1185)가 성전기사단을 아스칼론(Ascalon, 현재 이스라엘 도시 아슈켈론)에 입성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데 이 400여명에 달하는 기사단 일원들은 몽기사르 전투(The battle of Montgisard, 1177.11.25)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대패하고 1178년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고 군대를 복구시켜 여러 차례 접전을 통해 대치하게 되는데, 안티오크 총대주교 르노 드 샤티용(레오날드 샤티옹, 1125~1187)이 1181년 휴전 협정을 깨고 살라딘의 함선을 노략질하고 군대를 기습공격하는등의 행위로 살라딘이 항의했지만 이미 보두앵4세역시 르노 드 샤티용을 통제할 수 없을만큼 영향력이 커진 상태여서 항의가 먹히지 않게 되면서 결국 1182년 다시 전쟁이 재개된다. 1186년 살라딘은 르노 드 샤티용의 기습적 약탈행위와 야만행위에 분노하여 카라크(현재 요르단)를 공격하지만 트리폴리 백작 레몽(Raymond III of Tripoli, 1140~1187, 재위1152~1187)의 수비로 막혀버리지만 1187년 7월, 하틴 전투(The battle of Hattin, 1187.07.04)를 통해 10월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키고 대승과 함께 장기간 분노를 유발시켰던 르노 드 샤티용이 포로로 잡히게 되고 살라딘이 직접 죽인다. 

 

명성

살라딘은 온화한 성품과 자비로운 대처로 유명했는데, 1187년 10월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끝까지 수비하던 귀족(이블랭 영주) 발리앙 디블랭(Balian d'Ibelin, 1143~1193)이 수천에 달하는 예루살렘 왕국 내 무슬림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여 살라딘을 협상대로 이끌게 한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 내 기독교도들 모두 10%에 해당하는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가게끔 하였으며 10%에 미치지 못한 몸값을 지불하여도 무사히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틴 전투는 십자군에게 있어서는 재앙같은 패배이자 예루살렘이 함락당했다는 큰 충격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제3차 십자군 원정(The third Crusade, 1189.05.11~1192.09.02)의 발단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제3차 십자군 원정

예루살렘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노3세(Urbanus PP. III, ?~1187, 재위1185~1187)는 충격으로 인해 선종해버리고 후임 교황이 되는 그레고리오8세(Gregorius PP. VIII, 1100~1187, 재위1187)는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다시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호소한다.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 초대 왕 헨리2세(Henry II, 1133~1189, 재위1154~1189)와 프랑스 카페 왕조 왕 필리프2세 아우구스트(Philippe II 'Auguste', 1165~1223, 재위1180~1223)는 서로 영토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오8세의 십자군원정 참전을 요청받아 전투를 종료하고 십자군에 참전하기위한 준비에 돌입하지만 1189년 잉글랜드 왕 헨리2세의 장남 리처드(미래의 리처드1세)가 동생 존(미래의 존 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고 자신이 리처드1세(Richard I, 1157~1199, 재위1189~1199)로 즉위하게 되면서 프랑스와의 분쟁이 다시 재개된다. 어찌저찌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1155~1190)도 답하여 1189년 십자군이 출정하게 되고 셀주크투르크 수도 이코니움(Iconium)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1190년 6월 10일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가 살레흐강에 빠져 익사해버리고 만다. 사실상 십자군의 구심격적인 인물인 신성로마황제가 사망해버리자 십자군은 와해되어버리고 살라딘의 군대의 공격에 노출되어 줄곧 패배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분쟁중이였기에 따로 십자군을 이동시키고 겨우 도착하는데, 1191년 4월 프랑스 왕 필리프2세가 익사한 황제 프리드리히1세의 병사들을 규합시켜 아크레(Acre, 현재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 아크레)포위공격을 시작하고 리처드1세의 군대도 1개월뒤 합류하여 1191년 7월 12일 아크레가 함락된다. 그러나 아크레 함락 이후 이들 사이에서 주도권 싸움이 터져버려 프랑스 왕 필리프2세가 8월에 프랑스로 돌아가버린다. 사실상 리처드1세의 군대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리처드1세는 살라딘의 군대와 1192년 하반기까지 의미없는 공방전을 반복하다 피로도가 누적되어 교섭을 통해 1192년 9월 2일, 예루살렘을 무슬림인의 통치기반을 둔다는 조건 하에 휴전이 체결되면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종료된다. 

 

사망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종료되고 6개월이 지난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55세의 나이로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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